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의 여진 정벌 (문단 편집) === 외교적 성패 === 이 전쟁 이후 친 고려파 여진족은 사실상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완안부를 비롯해 여진족들이 고려에 공물을 바쳐오면서 형식적 제후국 관계를 이어가고는 있어서 겉보기론 별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내부적으로 이전과 많이 달라졌는데 완안부 여진족과 대립을 하기 전까지만해도 동여진족들은 사실상 고려가 완전히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장악한 상태였고 특히 11대 문종 재위 시절 동안 여진족의 추장과 부족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주, 기미주, 고려의 영토로 편입 시켜달라는 요청이 폭증하여 실제 11개 주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 전쟁에서 친 고려파[* 숙종 때 고려가 완안부에 패하면서 완안부에 붙어버린 추장들이니 친고려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건 반만 맞는 소리로 이들은 본래 숙종 때까지는 고려에 붙었던 동여진족 추장들이다. 고려는 여요전쟁 이후 여진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는데 특히 숙종 시기에는 세력을 키워가던 완안부의 위협에서 살아남으려고 고려에 붙게 된 여진 부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완안부에 붙게 되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고려가 우세를 점하면 다시 고려에 붙을 가능성이 큰 추장들이었으며 장성 밖의 추장들이란 점에선 문종 시기부터 있었던 기미주 여진도 있었다고 봐야한다.]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하고 동여진족이고 완안부 여진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여진족들을 몰아내버린 상황에서 터전을 빼앗긴 자신을 지원하고 고려의 대군에 결국 승리한 완안부의 모습을 보고는 결국 고려에 등을 돌리게 된 것. 사실 이 전쟁 과정과 결과를 생각한다면 동여진족들 입장에선 믿었던 고려는 자신들을 배신을 했고 자신들을 치고 있던 완안부쪽에서 오히려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결국 고려와 화친을 이뤄내면서 9성 전부를 반환받고 부하들을 돌려받는 것을 직접 지켜본 것이다. 힘도 자신들보다 강한 데다가 고려는 배신, 심지어 고려쪽에서 자신들의 관리를 완안부에게 떠넘긴거나 마찬가지인 그 상황에서 완안부를 버리고 고려에게 붙는 것은 실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힘든 선택인 것이다. 괜히 일제강점기 학자 때부터 이 동북 9성 반환으로 여진은 더 커졌다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이 반환으로 여진족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영토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구심점과 위상, 명분 그리고 민족의식[* 보통 외부에 강력한 적이 있을 때 내부가 결속된다.]을 얻어서 커졌다는 의미도 된다. 이후 완안부를 중추로 [[금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1124년) 그러나 정치 외교적으로 보자면 [[동북 9성]]을 반환하기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전략적 목적은 달성했다고 자평할 수 있다. 여진의 본격적인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 전쟁을 개전한 고려와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여진 두 나라가 치열하면서도 처절히 싸웠다. 특히 여진 입장에서 보면, 일시적이긴 하나 자신들의 살아갈 기반이 송두리채 날아가기도 했었고 이것을 되찾기 위해 말 그대로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으며 험한 지형에서 정말 생사를 건 악전고투를 몇년 간이나 치러야 했다. 고려가 여진족에게 굴욕을 당했던 만큼 여진 역시 고려를 잘못 건드리면 좋을게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9성 반환 협상을 통해 양국 관계가 완전히 평화적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뒷날 건국된 금은 중국의 이민족 왕조들이 후방 정리 차원에서 자행한 한반도 침공을 하지 않고 군신 요구에 그쳤다. 서로간에 친다고 해봐야 고생스럽기만 하는걸 이해하고 있으니, 딱히 예방전쟁 같은 게 필요 없어진 것. 이후에도 두 국가는 서로의 우호 관계에 해가 갈 일이 생기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훗날 여진족의 후손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정묘호란|조선을 예방전쟁으로]] [[병자호란|완전히 제압한 후]] 조선 위에서 일방적으로 강력한 상국으로 군림한[* 다만 몽골족의 [[원나라]]에 비하면 그 군림의 정도는 덜했다. 원나라는 고려에 제대로 내정간섭까지 했으니 말이다.]것과는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서경(고려)|서경]] 천도 및 금나라 정벌을 요구한 [[묘청]]의 의견을 고려 정부가 [[묘청의 난|내란을 각오하고]] 묵살한 것이나, [[조위총]]이 [[무신정권]]을 혁파한다는 이유로 [[금나라]]에 사람을 보내 "서경 이북 40여개의 성을 바칠테니 병사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금나라에서 깔끔히 씹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요나라]]가 점거하고 있던 [[신의주|보주]] 지역에 대한 영유권도 훗날 [[금나라]]로 성장한 후 [[고려]]에게 넘겨주게 된다.[* 보주성 반환에서 금나라에선 땅은 주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금나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고려에선 이미 다죽었다고 반대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금나라#s-11.2|다만 그냥 넘겨준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금나라#s-11.2|금나라 항목의 고려와의 관계]] 항목 참조) >(아무런 소득이 없는거 아니냐는 말에)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9성을 돌려주면서 약속을 받아내죠. 동북면 여진이 대대로 조공을 계속 바치겠다는 것은 그 지역의 여진을 책봉함으로써 [[외왕내제|고려가 얻을 수 있는 황제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기왓장 하나도 던지지 않겠다, 여진이 고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동북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여진이 고려가 경험했던 것과 아주 다른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때 금나라가 건국되는데요. 계속 금은 9성 환부라고 하는 부채를 진정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금이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을 멸망시키면서도 고려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 정책을 일관합니다. >---- >이익주. [[역사저널 그날]] -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 중 이 정벌에서 활약한 [[척준경]]이 이후 금에 대한 사대를 수용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는 해석도 있다. 정벌을 통해 고려의 한계와 여진의 국력을 인식한 척준경이, 금과의 전면전보다는 사대라는 외교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